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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이것저것을 하다가 밤이 지났고 아침이 되어 근검하게 배달되는 신문을 훑다가 (이건 사실 거짓말) 책을 보다가 밥을 조금 먹고 병원에 갈까 잠깐 또 생각하다가 그냥 침대에 누워 별을 세고 있었다. 타이밍, 이 중요하다 나는 어느 한 시점을 제대로 잡으면, 항상 제대로 일이 풀릴 것이라고 여긴다. 한편으로는 그것이 기만이라는 것도 알고 있어서 때때로 과연 내가 누구 편인지 궁금할 때가 많다. 그러고 보니 아주 오래전에 꾸었던 꿈이 떠오른다. 그때 나는 (꿈 속의 망상으로) 이산화탄소병, 에 걸렸었다. 이 병의 증상은 들숨은 가능하지만 날숨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물론 조금은 당황했었다. 숨이 내쉬어지지가 않아서 가슴이 계속 부풀어올랐다. 그런데 고통스럽지가 않았다. 당황은 했었다. 틀에 맞지 않는다. 부정교합, 이다. 또 어제는 하인라인의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을 중고로 내놓는다는 사람에게 메일을 보냈다. 두 권을, 가능하면 구하고 싶다고. 그러나 답장으로 온 메일엔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다고 적혀 있었다. 나는 그냥 “달은 무자비한 밤의 여왕”을 두 권 구하고 싶었을 뿐이다. 한 권은 내가 보고 다른 한 권은 다른 사람에게 선물로 주려고 했다. 이상하다. 분명히 메일 주소도 맞게 보냈는데… 톰 맥레이가 (차라리 바라는 바 대로) 가죽바지에 길게 머리를 기르고 코카인이나 빨아대는 롹커처럼 살고 싶기도 했다. 문제는 내가 노래 부르기나 악기에 전혀 조예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자족하는 것으로 만족해야겠다. 아, 그런데 지금 내가 왜 깨어 있냐 하면은 어제 마치고 보낸 일감에 조금 문제가 생겨서이다. 큰 문제는 아니다. 컴퓨터를 켜는 것은 내게 정한수를 떠놓고 비는 듯한 일종의 제의에 가까운 것이기 때문에, 얄밉게 할 일만 마치고 전원을 내리는 짓은 하지 않는다. 찬찬히 다시금 사이트를 둘러보고 윈앰프를 켜서 음악을 듣고 (한 두어 곡) 여기에 글을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때로는 열 서너줄도 더 쓰고 그냥 지워버린 다음에 이불 뒤집어 쓰고 울다가, 또 때로는 나중에 써야지 하면서 다음에 지워버리거나 한다. 횟배를 앓는, 정신은 은화와 같이 맑다. 또 뭐였더라? 딕셔너리 넘어가듯. 날개에서 아마도 주인공의 처는 주인공을 매우 사랑했을 것 같다. 사랑이 무한한 잠재력이라면, 그의 처는 드디어 그에게 없던 날개를 사주었던 것이다. 내가 항상 하는 말처럼, 아주 먼 과거에 들었던 아주 먼 미래의, 혹은 아주 먼 미래에 들었던 아주 먼 과거의 꿈 같은 것. 미안하지만, 나는 이것보다 더 적확하게 내가 표현하고 싶은 바를 표현하는 표현을 표현해 본 적이 없다. 이게 내 잠재력이라면 잠재력이고, 내 한계라면 한계다. 그런 맥락에서 무엇이 어떤 것의 미래라면, 그것은 곧 어떤 것의 과거라는 말도 된다. 그래서 ‘남자는 여자의 미래다’가 왜 그렇게 과거에 집착하는지, 과거에서 곧 미래인 현재에 때때로 과거가 투영되면서 이 영화가 이야기를 뭉그러뜨려 어떻게 판타지를 만들어 나가는지 잘 알 수가 있다. 아마 나만 아는 것 같다. 왜냐하면, 슬프게도… 내게, 여자는 항상 먼 미래에 보았던 과거의 잔영이 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사실 여러분들은 이게 무슨말인지 이해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애써도 된다는 얘기) 나는 나만이 아는 언어로 내가 생각하는 바를, 미래의 나에게 들려주기 위해 이 글을 쓰고 있다. 약간이라도 제대로 이해해보고 싶은 사람은 “The Longest Journey”라는 게임을 끈기를 갖고 마지막까지 플레이해보기 바란다. 내가 식음을 전폐하고 보름동안이나 플레이 해야만 했던 정말 아름다운 게임이다.

그러므로,

중국인의 방에 갖힌 인간들이여. *용기를 갖고 / 패배하라.

*”피를 마시는 새” 中

미친 생각

올 겨울은 추웠지만 사실은 그다지 춥지 않았다. 분명 예년보다 대륙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훨씬 더 날카롭다. 하지만 어머니는 마치 생애 마지막 겨울인 것처럼 미친듯이 보일러를 틀었고 결과적으로 방안에서 생활하는 일이 많은 내게, 그것은 매우 따뜻한 겨울이었다. 또 어떻게 보면 나조차도 발 하나 들여놓기 힘들 정도로 엉망진창, 그런 마음이 되었고 을씨년스럽고 어두우며 보라빛의 세계였다. 그리고 빼앗긴 생에도 봄은 오는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폐병쟁이의 각혈처럼 드문드문 부서진 채로 올 것이다. 개나리가 무슨 색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내 혈관 속에는 피보다 우울이 더 많이 흐르고 있으므로.

마지막으로, 그러나. 행복하기로 했다. 행복해야만 할 것이다. 기묘한 분열을 느낀다. 우울한 행복이거나 행복한 우울이거나. 흥분과 혐오와 저주, 자살금지 지금살자…

아무튼 나는 어떤 미친 생각을 하고 있다. 내가 지금 불행하다는 것인데, 이 불행에는 어떤 당위가 포함된 것 같다. 아니 이 말은 내가 불행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세상이 어떤 조화 아래 움직인다면, 모든 행복하려는 사람들과 동일한 농도로 어떤 불행하려는 사람들이 존재해야 한다. 거룩한 자기희생… 이런 얘기도 아니다. 어이없는 시도들이 있다. 매우 보잘 것 없고 한편으로는 정신분열적인 판단들… 감히 내가 그 불행을 떠맡아도 될 것인가. 나는 유연해 질 것이다. 한편으로는 매우 단단해져야 한다.

처음으로 호밀밭의 파수꾼 같이.. 그러나 내게는 피비가 없다. 아마 꼭 피비가 있을 필요는 없을 것이다. 상상해보면 당신들 모두가 내게 피비였으면 좋겠다. 화난 코끼리. 눅눅해진 팬티. 어쩌면 땅콩. 어쩌면 담배꽁초.

맞는 얘긴지 모르겠다. 언젠가 구로사와 아키라와 타르코프스키가 만난 적이 있었다. 구로사와는 타르코프스키의 ‘솔라리스’에서 행성 표면의 몽환적인 모습을 어떻게 그려냈냐고 물었다. (당시는 CG같은건 꿈도 못꿀 그럴 때였다.) 타르코프스키가 별 것 아니라는 듯이 ‘그거요… 그냥 천을 들고 흔들었을 뿐인데.’ 라고 대답하자 구로사와는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고 한다.

알렉산더에게 있어서 멸망해가려는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마리아와 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호밀밭의 파수꾼.

마지막으로 나의 불행.

별명

내 기억으로는 꽤 오래 전부터 인 것 같은데, 어쩌면 그다지 오래 되지 않았을 것 같기도 하고.

가까운 사람들은 나를 ‘(이)주발’이라는 별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름 때문에 그렇게 불리게 된 것 같은데, 딱히 듣는 입장에서 기분 나쁠 일도 없고 (그렇다고 설레이는 것도 아니지만) 내가 화낸다고 해서 다른 식으로 불러줄 사람들도 아니고 해서 그냥 그러고 있다.

얼마전에 무료해서 검색엔진에 ‘이주발’을 검색해봤더니 이런 결과가 나왔다.


이주발은 안파신단다. 당연하지. 누가 날 팔아.


이주발의 주인이 거지였던가!!! 아, 나만 몰랐던 것인가!!!

아주 오래전에 나우누리라는 PC통신에 한참 매진해 있을때, 그 곳 사용자 메뉴 가운데 이름으로 회원을 검색하는 것이 있었다. 종종 내 이름으로 검색해보곤 했는데, 꽤나 많은 사람들이 검색되었다.
이주헌은 난데, 그럼 저 사람들은 누구인걸까 하는 얘기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는 순간이고 가 1인칭에서 3인칭으로 바뀌는 찰나이며 더 이상 세계가 따뜻하고 아늑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계기다.

일기

별로 술을 마실 일은 아니었는데, 언제나 후회는 때늦게 시작되듯이 그냥 먹기 시작한 술이 과했는지 새벽 내내 나는 위 속의 모든 것을 게워냈다. 지저분한 것들이 먼저 튀어 나왔고 끝내는 씁쓸한 체액까지 꼭꼭 씹어 뱉어냈다. 그리고 십분뒤엔 똑같은 지옥이 반복되었다.

아침엔 목구멍이 화끈거려 아무 것도 먹지 못했고 식구들이 모두 일터로 나가버린 어둑한 방안에서 나는 그냥 멀건 미음을 끓여 입에 떠 넣는다. 언뜻 발치에서 두꺼운 안경태를 연신 손으로 밀어 올리며 개다리소반에 무언가를 열심히 적어내려가는 주금깨 소녀가 환상처럼 보인다. 내가 신음하자 그녀는 당황해서 내게 돌아보고, “어디 좀 괜찮아? 물 좀 갖다줄까? 죽 좀 먹을래?” 하며 걱정해준다. “아아, 그냥 좀 속이 쓰려서. 아까 먹던 미음 좀 갖다줄래?” 그녀는 아뭇소리 안하고 미음을 적당히 데워서 간장과 함께 내온다. “그러길래 빈속엔 술 먹지 말라고 했잖아.”, “엄밀히 말해서 안주하고 같이 먹었으니 빈속은 아니었어.”, “그러셔.” 하고 토라지는 그녀. “뭘 쓰고 있었어?” 나는 그녀에게 묻는다. “그냥 옛날 얘기. 잊어버릴까봐.”

뭐 그렇다는 얘기다. 그랬으면 좋겠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언젠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는 얘기.

하하하, 웃으면 좀 나으려나.

근데,
나 사실 정말 외로웠던거 아냐?

3000번째 방문자 이벤트

그동안 많이 귀엽게 봐주셔서 29XX번이나, 여러분들이 방문해주셨습니다. 나는 매우 고맙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3000번째로 방문해 준 누군가를 위해 작은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몇십번 안남았네요. 혹시라도 상품을 바라고 열심히 F5키를 누르시는 분이 계실까봐 드리는 말씀이지만, 제가 알기로 이 태터툴즈는 1시간 이내에 같은 컴퓨터에서 방문한 기록에 대해선 유효방문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아닙니까? 아님 말구…

선물은 정말 작은거, 예를 들면 최신형 노트북이라던가 벤츠 어쩔씨구리 (난 이런 모델넘버엔 약해서 뭐가 좋은지 잘 몰라요) 라던가 개나 소나 다 가는 타워 팰리스 최상층 무료 입주권이라던가 뭐 그런거니까 너무 기대는 안하셔도 좋습니다. 참가상은 없냐구요? 참가상, 물론 없습니다. 있으면 좋을뻔 했는데요, 그쵸?

이번 이벤트에 협찬해준 이건히, 빌게이츠 등등 세계 굴지 기업주한테 심심하게 괘씸하다는 말 전합니다. 니들이 앞뒤 안가리고 있는거 없는거 다 긁어가는 바람에 오늘도 별이 바람에 스치우며, 가난한 나라, 가난한 가족, 가난한 아이들이 오늘도 쫄쫄 굶습니다. 죄송합니다. 나는 오늘 고기 먹었습니다.

3000번째, 딱 방문하는 분한테 딱 한번 이벤트 당첨 축하 창이 뜹니다. 팝업창이 아니니까, 구글 툴바나 xp sp2같은거 쓰셔도 무방합니다.

축하 창에는 모종의 문구가 적혀있는데, 이 문구를 안내메세지에 따라 제게 이메일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오늘도 무사히 수고하셨습니다.
내일도 열나게 수고하시기 바랍니다.
아, 내일은 토요일이군요.
부모님은 아이들과 함께, 미혼의 청춘남녀는 자신들의 짝과 함께, 고3은 열나게 공부하시고 고2까지는, 까짓꺼 하루 재끼고 피씨방에나 가서 열나게 레벨업 하시고 초딩들은 제발 좀 말 좀 순화해서 리플달고 유치원 이하 꿈나무들은 무럭무럭 자라나시기 바랍니다.
저는 느즈막히 일어나 시냇가 옆에서 돌고래에게 정어리나 던져줄까 합니다.

이만 총총.
—->
참, 약 한달전부터 이상한 방문자 기록이 뜨고 있습니다. http://clip.daum.net… 으로 시작하는거 보니까, 어떤분이 다음에서 서비스하는 즐겨찾기에 제 사이트를 등록해놓고 줄기차게 들어오시는 것 같습니다.
나는 당신이 빨갛게 달아 오를 정도로 궁금합니다. 대체 당신은 누구시길래…

1. 나는 남자다.
2. 나는 여자인데, 미성년자이거나 이미 가정을 이루고 있다.
3. 나는 여자인데, 주위에서 결혼하라는 압박이 심한 반면에 마땅한 남자가 없어 고민중이다.
4. 나는 국회의원이거나 대기업 회장이거나 월평균 수입이 1000만원 이상이면서 일년에 내는 소득세는 10만원 미만이다. (이런 개X끼!!)
5. 나는 골프를 잘친다.
6. 나는 초능력자다.
7. 나는 이주 외계인이다. (12월 말 강제추방예정…)
8. 나는 10개국어를 유창하게 말할 수 있고 12개국어를 읽고 쓸 줄 안다.
9. 나는 성별을 밝힐 수 없는 인간인데, 같은 관심사에 대해서 소근소근 대화하는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다.
10. 나는 저작권협회 알바생이다.

여기서 일단 1번, 2번인 분은 방문을 매우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자주 찾아주세요.
4번은 앞으로 오지 마라.
5번이면 열심히 노력해서 해외에서 인정받는 훌륭한 선수가 되어 대한민국을 빛내, 주든지 말든지…
6번이면 반갑습니다. 나는 텔레파시와 염동력이 가능합니다. 당신은 무엇을 할 줄 아나요? 언제 한 번 만나서 지구정복이나 한 번?
7번이면 잘 아는 MIB요원이 하나 있는데, 그 사람을 통해 정식으로 수속을 밟으면 지구인으로 귀화가 가능하다고 합니다. 연락주세요, 초공간통신단말번호 #$#@%-343-3@#$343-^&$# 입니다.
8번이면, 좋겠습니다.
10번이면 나는 안드로메다성인이므로 지구법에 저촉받지 않습니다. 만약 충돌적인 법률 문제가 발생한다면, 국부 은하연방 지방 법원 민원실로 문의하시기 바랍니다. 국부 은하연방 지방 법원 민원실은 지구로부터 은하 중심으로 약 3만광년 거리입니다. 공용운송수단이 없으므로 반드시 지구 로켓으로만 갈 수 있습니다. 주차비가 매우 비싼데, 민원때문에 왔다고 해도 도장 안찍어주니까 유념하여 주십시오.

자, 문제는 3번과 9번인 경우입니다.
일단 9번인 경우에, 나도 당신과 같은 친구가 필요합니다. 물론 내게도 그런 친구가 한두명쯤은 있지만 미묘한 알력같은게 있고 복잡한 치정문제도 얽혀있어서 순수하게 플라토닉한, 즉 가을의 맑은 바람과 같은 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당신이 그런 친구가 되었으면 좋겠군요.

드디어 3번.
축하합니다. 부디 코멘트라도 남겨주셔서(비밀글로) 서로 지속적으로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나는 매우 바쁘지만, 곤란한 상황에 처한 여성을 그냥 두고 지나칠만큼 바쁜 것은 아닙니다. 최선을 다해서 당신의 고민을 함께 해결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무지개 – 그는 드디어 외톨이가 되었다.

파이(∏)에 가능한 모든 수열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아니? 무지개엔 모든 색깔이 숨어있지. 천년도 더 된 이야기야. 어느 날 검은 현무암이 내게 전해준 이야기지. 옛날 이야기 하나 해줄까, 하면서.

그 현무암을 만난건 내가 오백살이 되어 기념으로 친구들이 보내 준 세계여행에서였어. 거기는 아마 스코틀랜드, 였던가 오슬로였지. 나는 유럽을 잘 몰라. 다 거기서 거기인가 싶은거지. 어쨌든 그 날은 매우 흐렸고 비나 눈이 올 것처럼 기어가는 날씨였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이 폭음을 내는 엔진소리가 신경을 긁어대는, 삼만년된 낡은 관광버스를 타고 야트막한 사랑을 하나 넘어가던 때였는데 결국 버스는 사랑의 정점에서 엔진과열로 멈추고 말았지. 두더지 운전수는 땀을 뻘뻘 흘리며 십분간 정차하겠다는 말만 남기고 지저세계로 수리공을 부르러 떠났고 관광객들은 투덜대며 버스에서 내려 잠시 머리를 식혔어. 나는 사랑을 헤매였다.

“관광객. 여길 좀 봐. 내 얘길 들어보겠나? 절대 기념품 같은걸 팔려는게 아냐.”

처음엔 그게 현무암이 한 말인지도 몰랐어. 너도 알다시피 현무암들은 눈에 잘 띄지 않잖아. 딱히 말을 하는 현무암인지 명찰을 달고 있는 것도 아니고 말야. 나는 한참을 어리둥절했지.

“네가 서 있는 곳에서 앞으로 두 걸음, 왼쪽으로 세 걸음 걷고 보이는 나무를 왼손으로 잡은 뒤에 270도를 시계방향으로 돌아봐. 그럼 내가 보일꺼야.”

그래, 거기 그 녀석이 있었어. 꽤나 몸집이 큰 녀석이더군. 나는 무의식적으로 현무암의 머리를 쓰다듬었어.

“매끈하지? 칠천만년동안 비와 바람이 날 쓰다듬었더니 이렇게 되었어. 칠천만년이라… 어때, 너는 그 시간을 상상할 수 있어?”

“아니.”

천만년 이상의 시간을 생각해야 할 때, 나는 웰즈의 ‘타임머신’을 떠올려. 물론 거기엔 80만년밖엔 안나오지만, 그 어느 소설보다 리얼하게 시간을 묘사하지. 시간의 끝엔 뭐가 있는지 알아? 자주색 하늘과 보이지 않는 바람, 물질의 시체들이 있어. 그리고 영원동안 매직아워지.
현무암한테 웰즈의 이야길 하진 않았어. 어차피 그는 읽어보지도 못했을테니까.

“담배 가진거 좀 있나?”

“운이 좋네 너. 딱 두 대 남았는데.”

“그럼 한대씩 피우자.”

나는 담배에 불을 붙여서 현무암의 얼굴에 난 구멍 가운데 적당한 크기의 구멍에 꼽아줬지. 나도 그 옆에 앉아서 담배를 피워 물었어.

“옛날 이야기 하나 해줄까?”

슬쩍 버스 쪽을 쳐다보니까 두더쥐 운전사가 수리공과 함께 연신 버스 밑을 오락가락 하더라고. 금방 고쳐질 것 같지 않아서 현무암에게 그러라고 했지.

“나는 사실 강물이었다. 어두운 지하수로를 한참이나 굽이 돌다가 지상으로 스며 나왔을 때, 감격하고 말았지. 햇빛과 꽃과 바람, 때로는 물장구치는 아이들의 발목을 휘감아 흘러가기도 했고 무거운 배를 밑으로부터 밀어 올려 수면에 띄우는 장난을 치기도 하면서 계속 하류로 밀려갔어. 밀려갔다, 고 해야 옳을꺼야. 당시에 나는 어떠한 목적을 갖고 그랬던건 아니었거든. 뭐랄까, 이 언덕에 가만히 앉아 일년 가운데 칠천팔백삼십일쯤 흐린 저 하늘을 응시하고 있으면 이따금씩 홍수가 나는 것처럼 햇빛이 쏟아져 내리는걸 볼 수 있어. 구름이 반으로 갈리면서 말이지. 그런거였어. 오월의 빛, 장마처럼 내리는 빛.”

그런 광경을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 흘끔 하늘을 올려다봤지. 잠자리가 낮게 날았어, 잠자리가.

“강물의 끝엔 뭐가 있는지 아니? 노을이 있다. 검지만 완전히 검지는 않지. 도무지 그 빛깔이 생각나지 않아, 분명히 나는 그걸 봤는데 말야. 사람들은 정오의 태양을 찬미해, 그 강렬함, 그 아둔함을 좋아하지. 오 솔레 미오, 어쩌구 라는거야. 오 솔레 미오? 아, 언젠가 바람이 전해 준 노래야. 바람은 우체통에게서 배웠다더군.
하지만 노을은 완전한 빛깔이야. 그 어떤 것도 아니면서 모든 색이지. 무지개를 봤니? 무지개는 노을의 사촌쯤 되는 녀석이야. 녀석은 비가 내린 뒤에 내키면 나타나지. 나는 그 모든 것을 사랑했어. 비록 내가 담을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사랑이란 그런게 아니겠어? 사랑하는 자는 언제나 동경할 수 밖에 없어. 그래서 현무암이 되기로 했지.”

“왜 하필 현무암이?”

“현무암이 되면 영원히 동경할 수 있으니까. 그리고 내키지 않으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도 돼. 가끔 바람이 놀러 와 세상 일을 전해주지. 나는 그냥 응, 응, 그렇구나 하며 시간을 보내는거야. 그 외에는 누구도 내게 어떻게 하라는 식으로 강요하지 않아.”

“너 오늘 현무암치고는 말이 많은 것 같은데.”

“그런가.”

“외롭지는 않았어?”

“어떤게 외로운거니. 나는 항상 외로웠어. 하지만 그 어느때에도 행복했지.”

“그럼 이 구멍이 네 눈물이 솟는 자국이란 말야?”

“응. 마치 네 두 눈이 항상 충열되어 있는 것처럼.”

“… 나는 말야, 가끔 아무렇지도 않은 상태에서 몸이나 마음이 몹시 허탈해져. 꼭 뭔가 엄청나게 서러운 일이 있어서 두세시간동안 온 기력을 쏟아 울고 난 다음처럼. 하지만 난 전혀 슬프지 않았는걸.”

“나는 너보다 구십오억년이나 더 살았어. 시간은 진실의 알을 품고 있지. 너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고마워. 힘이 난다.”

“고맙다면, 이제 담배를 빼 주겠어? 아까부터 필터까지 다 타들어간 바람에 몹시 맵다.”

“엇, 미안해.”

하고 나는 담배를 조심스럽게 빼 주었지. 우리는 한동안 하늘을 올려다봤어. 혹시나 빛이 내리지 않을까 하고. 대신 노오란 나비가 날아와 현무암 머리에 앉았다.

“현무암씨. 너는 언젠가 사라지니?”

“아니. 희미한 웃음이 될꺼야.”

“나는?”

“너는 바람이 되겠지.”

“나도 누군갈 사랑할 수 있을까?”

“미안하지만, 넌 그럴 수 없어. 이미 네 안에서 모든 세계가 죽어버렸어.”

“너무 아프다…”

“미안. 하지만 내 잘못이 아냐. 모두 네 잘못이야.

“난 바람이 되지 않을거야. 대신 현무암이 될래. 아, 그렇구나! 이제 알았어. 너도 이미 네 안의 모든 세계를 죽여버렸구나!”

순간 현무암은 희미한 웃음이 되었지.

대항해시대 온라인

하드를 포맷하고 윈도우를 다시 깐 바람에, 이전에 종종 기분전환용으로 즐기던 게임들과 완전히 바이바이 해버리고 말았다. 길드워는 누군가의 말처럼 유료화 되자마자 길드워는 어떻게 먹으면 맛난 음식인데?가 되어버렸고, 워록은 곰곰히 생각해보니 너무 잔인해서 하기가 싫어졌고, 잠시 좌백과 진산 부부가 공동으로 개발에 참여했다는 가십때문에 시작했던 구룡쟁패도 일주일만에 초단순반복형 레벨링이 지겨워서 그만두었다. 그래서 별로 미련도 없고 미련하게 다시 게임들을 다운받아 인스톨하는 것도 귀찮아서 죠이스틱을 사서 동생이랑 비행기 슈팅게임이나 하고 그랬다.
lunamoth님의 대항해시대 온라인에 관한 글을 보다가, 그럼 이거나, 하는 심정으로 클로즈드 베타테스터에 신청해서 이틀 전인가 당첨(?)이 되었고 클라이언트를 다운받아 잠시 플레이해본다.
이제 뭔들 ‘억!’ 한게 없다. 육개월 전이었으면 아마 식음을 전폐하고 달려들었을텐데, 지금은 모든게 시들하다. 차라리 멍하니 음악 들으며 가을로 깊어지는 맑은 공기를 감상하는게 오히려 더 즐겁다. 어쨌든.

롤플레잉 게임이란게, role playing game이다. 역할극 놀이. 게임 내에서 나는 현실에서의 내가 아닌 창조된 새로운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 보는 것이다. 시금털털한, 대한민국 이십대 후반의 청년으로 살아내야 하는 무거운 짐을 벗고 다른 ‘내’가 되어본다.
어떨까? 즐겁지 않나? 나는 그래서 빈약한 진실을 더 사랑하게 된다. 결국 사람든 돌아와야 할 곳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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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라는 지평의 확대. 16세기 초 대양항해기술의 발달. 성공, 부와 명예. 확장, 정복. 편가르기. 발견하면 그야말로 모두 내것이 되던 시절. 그러나 발견당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재앙의 시작이었던, 또 그런 시절.

리스본 뒷골목에서 태어난 kirrie. 태어난 직후 부모에게 버려져, 당시 리스본의 실력자였던 바스톨로뮤가 지원하는 성당 직할의 고아원에 맡겨진다.
매사에 무기력하고 항상 희미한 예감의 냄새를 따라 불투명한 스테인드 글라스 저 편, 푸른 바다만을 그리워하는 나날이 계속되다가, 그녀 나이 십칠세에 고아원을 탈출하여 무작정 어딘가로 떠나는 배에 밀항한다.

… 그리고 그녀에게 수많은 일이 일어났다.

십년 후. 그녀는 리스본에, 왼쪽 눈가에 생긴 긴 흉터 그리고 얼마의 돈과 함께 돌아온다.

“십년.”

십년. 입밖에 내어 보지 않으면 그녀 자신이 세월을 실감할 수 없을 것 같아 내뱉은, 짧막한 첫마디. 부둣가의 소음 사이로 곧, 십년은 묻혀버렸다.

사실 ‘그녀에게 수많은 일이 일어났다.’는 굉장히 불쾌한 묘사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폭풍우 뒤 많은 모래가 쓸려간 해변에 삐죽히 드러난 난파선 조각같은 지난 십년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니, 이 부둣가에서 그녀가 산 럼주를 단 한잔이라도 마셔 본 뱃사람이라면 한달이나 두달쯤 계속해서 토해내도 다 토해내지 못할 만큼 방대한 그 이야기들을 하나부터 열까지 찬찬히 듣고 기억하며 가슴 아파해야 한다. 우선은, 그 흉터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할까? 어디서 돈을 벌었는지에 대해서? 그녀를 거쳐간, 혹은 그녀가 거쳐간 사람들에 대해서?

그러나 우린 아무 얘기도 들을 수 없다. 그녀는 항상 무언가를 생각하는 것처럼 심각한 얼굴로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을 것처럼 웅크려 있거나 주점에서 매우 취해 남자들 사이를 오가며 분주하게 시시컬컬한 농을 주워섬기고 있을 뿐이다. 그녀는 결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법이 없다.

많은 돈과는 거리가 멀어 이 부두의 누구나 조금씩 손대본 밀교역도 하지 않고 (사실은 재주가 없어 항상 손해를 본다.), 그저 가끔 주점을 찾는 의뢰인들로부터 들어오는 해역의 조사나 소문의 진상을 파해치는 일로 생계를 꾸려간다. 제법 일처리가 꼼꼼해서 단골로 그녀를 찾는 의뢰인도 몇몇 생겼다.

그녀의 꿈은 육지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무인도를 발견하는 것과 고아원에서 헤어진 동생 세나를 찾는 것이다. 결국 그녀는 동생과 함께, 고원과 같은 무인도에서 살아가려는 것 같다.

몇몇 남자와 가까운 사이가 되기도 했지만, 누구와도 마음을 나눌 만큼 가까워지진 않았다.

자주 하는 말은 ‘너나 잘하세요.’다.

talk to cat

어느 날 밤늦게 담배를 사러 간다. 길을 걷다 모퉁이, 쓰레기더미 사이에서 늦은 저녁을 해결하려는 검은 고양이 한마리를 만났다. 고된 식사를 방해하지 않기 위해서 까치발로 살금살금 돌아가려는데, 그만 슬리퍼가 아스팔트에 길게 끌리는 바람에 고양이가 흘끔 나를 돌아본다.

“저, 나는 그냥 담배사러 가는 길이니까 그냥 계속 먹어도 돼. 장난치지 않을게.”

고양이는 내 말의 진위를 따져보려는 듯이 날 한참 노려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식사에 열중한다. 가끔 딱딱한 뼈다귀라도 씹는지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까치발로 조심스럽게 모퉁이를 돌아간다.

“모든 사람이 너만큼만 조심했으면 좋으련만.”

“뭐라고?”

고양이가 말을 했다.

“너만큼만 조심했으면 좋겠다고.”

“네가 말한거야?”

“그럼 여기 나 말고 누가 있는데?”

“분명히 니코틴 금단현상일꺼야. 빨리 담배를 사러 가야지…”

나는 갑자기 무서워져서 후다닥 슈퍼로 뛰어가 디스플러스를 샀다. 가게를 나오자마자 담배를 한 대 빼어 물고 불을 붙였다.

“아무래도 요즘 너무 무리하는걸까.”

다시 왔던 길을 되밟아간다.

“이봐, 놀란거야?”

흠칫.

“뭘 이런걸로 놀라고 그래. 로켓을 쏴서 화성까지 보내는 시댄데, 고양이가 말 좀 한다고 해서 놀라 후다닥 뛰어갈 필요는 없잖아?”

쓰레기 봉투 위에 얌전히 앉아 있는 고양이.

“이리 와 봐. 사람은 안잡아먹어.”

나는 홀린듯이 고양이에게로 다가간다.

“담배 산거야? 뭐 샀어? 디스플러스?”

“..으, 응.”

“한 대 줘봐. 식후땡.”

불을 붙여 담배를 건냈다. 저 고양이발로 과연 담배를 집을 수 있을까 싶었는데, 뭐 어떻게 잘 피우고 있다.

“다음부턴 레종 피워. 그거 한 갑 피우면 우리 고양이들한테 1퍼센트씩 모델료가 떨어지거든.”

“그건 좀 비싼데…”

“시끄럽고, 피우라면 피워. 알겠어?”

“응. -_-;;”

“너 저 위에 화평빌라 다동에 사는 애지? 맨날 밤새도록 불켜놓고 있는.”

“응.”

“애들이 가끔 네 얘기 하더라. 너 언젠가 네 창문가 지나가는 고양이한테 먹을거 줬다면서?”

“몇 번.”

“네 마음은 잘 알겠는데, 우리 고양이들도 프라이드란게 있다구. 우린 스스로 구하지 않은 먹이는 먹으면 안돼.”

“그 고양이는 잘 먹던데.”

“그때 걘 임신중이어서 뭐든 질 좋은걸 먹어야 했으니까 어쩔 수 없는거였고, 아무튼 주지 말라면 주지 마.”

“있잖아,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고양이들이 쓰레기봉투를 다 찢어놔서 맨날 아줌마들이 골치아파한데.”

“어쩔 수 없잖아. 그렇게 꽁꽁 싸매놓은걸 이 손으로 어떻게 풀란 말야. 인간들은 참 웃기다. 어차피 버릴꺼, 뭘 그렇게 매듭을 지어 놓는거야? 버리는건 편하게 버리라구. 거기서 우리가 먹을 수 있는건 다 먹어치울테니까, 나머진 새벽에 쓰레기 치우는 사람들이 가져가겠지.”

“사람들은 그걸 예의라고 생각해. 쓰레기봉투를 꽉 매듭지어 놓는거.”

“정말 예의를 지켜야 할때나 지키라고 해. 나는 인간들이 쓰는 글자를 읽을 줄 모르는데, 이 골목 고양이 대장은 오래 살아서 그런지 신문인가 하는걸 읽더라구. 대장이 그러는데, 니들은 정말 필요할 때엔 무신경하고 불필요할때에만 열심이라고 하더군.”

“할 말은 없다.”

“그래. 그렇게 말하는게 예의야.”

“너는 이름이 뭐야?”

“고양이는 이름이 없어. 그냥 고양이지.”

“너는 다른 ‘너희’들과 어떻게 네 자신을 구분하니, 그럼?”

“왜 구분을 해?”

“불편하잖아, 그런건… 누굴 불러야 할때도 그렇고.”

“누굴 불러야 하면 그 녀석한테 직접 가서 이야기하면 돼.”

“아무리 그래도…”

“우리 고양이는, 하나하나가 모두 고양이면서 총체적으로도 모두 고양이야. 부분과 전체가 통일되어 있는거지. 우리는 집단적으로 하나의 공동체면서, 존중받는 개체들이기 때문에 그 가치는 어디에서나 같아.”

“밤에 자지 않고 있으면 너희들도 꽤 싸우던데…”

“발정은 우리도 어쩔 수 없다구.”

“발정.”

“그래, 발. 정.”

담배를 다 피워서, 고양이는 꽁초를 땅에 그냥 버리더니 발로 능숙하게 비벼 껐다.

“안뜨거워?”

“뜨거워.”

“대단하시군.”

“뭐, 별로.”

바람이 불자, 나무가 소스라치게 놀라 몸을 떨었다.

“다음에 또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

“내가 내키면.”

“있잖아, 언제라도 배가 고프면 내 방 창가로 와서 먹이를 구해가.”

“누가 주는건 안먹는대도.”

“나는 그냥 버릴테니까, 그 뒤는 알아서 하라구.”

“너 이자식, 머리 쓰는거냐?”

당황.

“아니, 난 그냥…”

“심심하면 놀러갈께. 먹이 따윈 내가 다 알아서 하니까 괜히 걱정해줄 필요 없어.”

“그래, 그럼.”

“이제 가.”

“알았어. 잘 지내.”

“너도.”

두서너 걸음 걷다 말고 뒤를 돌아봤더니, 이미 고양이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주 무거운 상상

원래 이 글은 전혀 다른 제목으로, 다른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쓰다가 만 글인데, 다시 수정해서 올리려다가 왠지 기분이 묘해서 다 지워버리고 다시 쓰고 있다.
제목은 ‘아주 즐거운 상상’이었다. 야한 얘기는 안나온다. 요새 곧잘 혼잣말을 한다. 대개는 ‘아 씨발 이거 왜 이래’, ‘대체 뭐가 문제야’, ‘졸라!’ 등등이다. 그러다 정말 대개는 ‘역시’, ‘난 졸라 천재야’, ‘뭐 이런게 다 있어’ 등등으로 끝난다. 문제가 해결된 것이다. 충돌, 수습. 뭐 그런거. 그런데 아주 예전엔 친구들하고 있을때나 욕을 섞어가며 얘길 했지, 퍼블릭 도메인에선 의식적으로 욕이 안나오도록 조심했다. 아,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후천성욕안하면입안에철조망돋힘증후군 같은거에 걸렸다고 생각하시면 안된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거나, 그렇게 생각이 된다거나, 역시 넌 그랬구나 하고 생각하거나 말거나 나하곤 상관없지만, 어쨌든 그렇다는 얘기다. 아, 그러니까 요즘엔 안그런다는 얘기가 되는 것 같다. 요즘엔, 심지어 무의식적으로 부모님 앞에서 나도 모르게 욕이 튀어 나온다. 물론 부모님을 향해서 하는건 아니고, 그냥 감탄사 대신에 욕이 나오는 정도다. 입 밖으로 욕이 튀어 나가면, 나도 깜짝 놀라고 (내색은 안하시지만) 부모님도 놀라는 것 같다. 내가 요즘 지극히 인간적인 수준을 벗어나 신인류로 변태하는 중이라서, 가급적이면 집안 누구도 나를 건드리려고 하지 않는다. 건드리면 설금설금 돋던 날개가 떨어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부모님 앞에서 욕을 한다고 개만도 못한 놈이라거나 후레쉬자식이라던가 졸라 미친새끼라던가 하고 생각해도, 뭐 나하곤 상관없는 일이지만, 뭐 그렇다는 얘기다. 그리고 왜 무거운 상상이냐, 혹은 희망일까, 에 대해서 얘기하겠다. 작년인가에 어딘가에서 시규어 로스, 라는 아이슬란드 4인조 롹그룹을 알게 되었다. 한때, 잠깐 헤어나지 못할 정도로, 아주 야금야금 녹아버렸다. 물론 그 뒤로 에릭 크립튼 다시 듣기 프로젝트라던가, 자나깨나 재즈사랑 깨진파일 다시보자 운동 등으로 간신히 정상생활로 복귀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제는 깜빡깜빡 생김새도 잊어버릴 것 같은 첫사랑, 그 희미한 기억처럼 묵묵하게 하드 속에 쟁여뒀던 그들이, 한창 뜨거운 여름이 발악해볼까 준비운동하는 지난 칠월 중순경 느닷없이 버스를 기다리려고 정류장에서 하염없이 한겨레에 눈을 팔고 있던 내 귓가를 울려버렸다. 사실 운건 내 마음이었다. 마음이 울자 귀가 따라 운 것 뿐이다. 그러니까 머리카락군이 귀야 왜 울어, 같이 울까? 하고 위로해주는 바람에 그 광경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내 눈도, 그만 울어버렸다. 뜨거운 여름에. 버스 정류장에서. 미쳐 버스가 당도하기도 전에. 아스팔트가 미쳐,
녹아버리기도 전에,
말이다.

어딘가에서 시규어 로스의 리뷰를 읽은 것 같다. 그들은 완전한 異세계의 롹커들이다. 톨킨이 지구를 잠시 떠나서 집필활동에 전념할 때에, 그는 완전히 비현실적인 현실세계를 만들어내기 위해서, 심지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종족의 언어까지 만들어낸다. 인터넷에선 이 언어로 쓰고 읽는 연습을 위한 사이트까지 등장했다.
시규어 로스는 그들의 음악을 위해 그들만의 언어를 만들었고 그 언어로 노래를 부른다. 기묘한 이 언어는, 희안하게도 전세계, 민족, 국경, 언어, 경제력, 피부색, 성별, 나이, 장애, 신분, 계급, 식습관, 성적취향, 욕의 구사능력을 떠나서 공평하게 같은 메세지로 이해된다. 그 메세지를 여기에서 소개하는 것은 매우 불합리한 일이거니와, 소개하려면 나도 그 언어를 배워야겠는데, 아무래도 그 언어는 말만 있고 문자기호는 없는, 칠백만년전에 인간이 아직 졸라 미개할 때 인간의 형제를 자처하여 지상에 강림했다는 라엘리안들이 사용했던 언어인 것 같다. 그들은 그 언어를 ‘희망어’라고 부른다, 라는 대목이 갑자기 버스 정류장에서 떠올랐다. 희망어. 희망어. 이 무수한 족쇄들아. 나를 단단히 감아다오.
희망어로 부르는 롹은, 그러나 깊푸른 심연의 색이다. 철저하게 정리되고 검증하고 반드시 희망이어야 할 것, 들로만 이뤄진 인공의 냄새가 난다. 아니, 어쩌면 그건 희망어가 아니라 일상어인지도 모른다. 공기만큼 가볍고 투명한 언어가 일만미터 심해에서 억만겁을 살아내야 하는 괴어처럼 경쾌하면서도 무겁게 흔들리다니.
희망이 무거워, 너무 무거워. 내겐 가벼움이 너무 무거워. 무거움은 너무 가볍지. 너흰 이걸 이해 할 수 있니? 왜 아침 산에 놀러 온 구름이 소스라치게 하늘로 돌아가는지, 상상 할 수 있니? 어떻게 사십오억년동안 파도가 해안으로만 밀려왔는지, 감당할 수 있니? 아주 작은건, 아주 작은 걸로 끝나지. 넓게 봐. 인간을 전체로 봐. 나는 이제 이 말이 들려. 어느 누군가, 가 아닌 인간이 내는 소리가 들려. 인간을 전체로 봐. 어느 누군가가 아냐. 전체야.

다시 아주 기분이 좋아졌다. 심지어 입꼬리가 재밌게 흔들렸다. 웃음이 나오려는 징조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을 때, 하나님이 말했다. 내 안에 있는 것들아, 서로 사랑하라.

천구백구십오년.

천구백구십팔년.

이천삼년.

이천오십사년.

삼만 칠천칠십년.

이십오역육천만년.

태양이 지금의 두배로 부풀어 오름.

칠십억년, 쯤.

태양의 지름이 지구와의 거리에 반.
지구에서 보는 태양은, 천구의 반을 가린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한다.

백오십억년.

뻥! 쾅! 우르릉!
거짓말. 거긴 소리가 안나요. 아무 소리도 안나요. 그냥 빛이 번쩍, 하다가 서서히 사그라들어요.

엔딩 크레딧 종료.

The END.

갑자기 막이 열리며 감독 등장.

인간 여러분. 즐거우셨습니까? (네!) 이렇게 이야기는 끝이 납니다. 이것은 굉장히 무거운 주제였지만, 전체적으로는 매우 가벼운 톤으로 읽히도록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아무쪼록 가시는 길 무사히 되밟아 가시길 바랍니다.
출구는 왼쪽입니다.
간혹 오른쪽으로 가시는 분들이 계시는데, 거긴 화장실입니다.
다시 한 번, 이 오랜 시간동안 끝까지 죽지 않고 버텨준 인간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 전해드립니다.

덥다

…는 것은 거의 우주적으로 명백하게 사실이다. 게다가 올해는 이상하게 더 덥다. 나는 두시간 전에 혹시 윗 집에서 미친척하고 난방을 하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공포스런 추측까지 해봤다. 태양에 던져 넣어도 녹을 것 같지 않은 가공할 냉커피와 물을 내내 들이킨다. 여전히 덥다.

샤워를 했다. 십분도 지나지 않아 슬슬 불쾌해진다. 덥다. 모니터에서 열기가 아닌 냉기가 나왔으면, 하고 바란다.

뭘 찾으려고 검색하다가 ‘인기검색어’ 라는 한줄짜리 안내메시지에 여름을 시원하게 나는 법이라던가 열대야를 극복하는 법이라던가 하는 검색어가 상위에 랭크되어 있다고 나오길래, 클릭해볼까 생각했다. 새벽 네시에 그 링크를 클릭해서 어째어째 주절주절 뭔가 아이디어를 알았다고 해도 딱히 실행에 옮길만한 상황이 아닌걸. 해서 그냥 참기로 한다.

까짓게 더워봤자 체열보단 낮다.

사막에서 행방불명된 어떤 사람에게서 수신자 부담으로 걸려 온 전화를 통해 얻은 소식에 의하면, 사막의 중심 (이 경우 사막의 중심은 지리적 중심이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 한계상황에 도달한 인간의 상징적인 중심을 의미한다, 고 한다.) 은 그림자가 없다고 한다. 빛과 열기가 그림자를 태워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가끔 새로운 행방불명자가 중심에 들어서면 다들 그의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조금이라도 그늘에서 쉬기 위해 아귀처럼 모여든다. 한때 한 명 분의 그림자에 1ms의 시간 동안 구천팔백칠십두명이 들어 온 적이 있는데, 그게 지난 10년간의 최고 기록이었다.

그에게 파라솔을 보내줄까 하며 주소를 물으려는데, 그만
잠에서 깨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