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발면 하나에 훈제 계란 3개를 사서 퇴근을 한다. 거의 매번, 집의 불은 꺼져 있다. (불은 꺼져 있다, 하니 삼사년 전에 네이버 블로그 시절에 썼던 ‘헤이, 택시’란 글이 떠올라 말미에 덧붙인다.)
부리나케 씻고, 사발면에 물을 붓고 밥을 한 공기 떠서 상에 놓고… 반쯤 삭아서 신맛만 나는 김치를 꺼내 티븨를 틀고 먹기 시작한다. 오늘은 거침없이 하이킥이 안하는가부다. 사실 나는 이런 류의 드라마를 오래도록 진득히 본 경험이 없다. 그냥 퇴근하고 밥먹고 나면 갑자기 진이 빠져서, 상을 치울 생각도 못하고 그대로 드러누워 한 삼십분 동안을 빈둥거리는데, 빈둥거리다가 거침없이 하이킥을 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것이 이제는 하이킥을 보지 않으면 그 다음 일 (예를 들면 상을 치우고 컴퓨터를 켜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하는 등등) 이 안되게 되었다. 그런데 밝혔다시피 이런 드라마들에 흥미가 없으므로, 이게 몇시에 하는건지, 무슨 요일에만 하는건지는 잘 모른다.
그렇게, 오늘은 하이킥이 안나오고 나쁜여자인가 착한남자인가가 해서 그냥 티븨를 끄고 상을 치웠다. 냉기가 찐득하게 묻어나는 부엌에서 설겆이를 하며, 문득 너무 심란하다고 생각했다. 어제는 무슨 일인가로 눈만 감고 밤을 샜다. 오늘 오전, 오후 내내 나는 멍한 정신에서 일을 했다. 오늘 밤은 푹 잘 수 있었으면 좋겠다.
마치 축제가 열리는 날 같다. 그 축제는 이웃마을인가, 혹은 시내인가에서 열리는 축제다. 다들, 심지어 가족도 축제의 열기에 들떠서 벌써부터 집을 비우고 동네고 뭐고 할 것 없이 한산하다. 나도 왠지 가야 할 것 같지만, 가고 싶지는 않고, 가지 않기로 하자니 안가면 뭐가 안될 것 같은, 이런 개똥같은 기분이다.
나는 정말 이런 삶을 원했었다. 요동없이 고요한 삶. 타인에 의해서 뜨거워지지 않는 삶. 이 미친 것이 너무나도 그런 삶을 원한 나머지 여자친구와도 헤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정말 춥다. 사실 그다지 춥지는 않지만, 느끼기에 울음이 나올 정도로 서늘한 기분 같은거 말이다.
물론 가끔 짜릿하게 행복한 시간도 있다. 출퇴근하면서 틈틈이 읽는 ‘시간의 역사’라던가, 다섯달째 듣고 있는 골드베르크 변주곡이라던가 하는 것들. 그러나 그 외에 나는 대부분 정체상태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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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좀 먹어줬다. 왜 먹었고, 누구와 먹었고, 어디서 먹었으며, 무엇을 먹었는지 여기에 세세히 기억해서 적고 고쳐서 다듬고 하는 짓은 좀 멍청이 같은 것이리라. 술을 먹을 때, 그러니까 마실 때, 가장 중요한 플롯은 ‘술을 먹었다.’ 라는 건조한 묘사 뿐이다. 이게 기본적인 구조이며, 알파이자 오메가다. 그리고 딸깍, 하면서 끝난다. 그러니까,
술을 좀 먹어줬다. 사실 좀이 아니라 좀 많이 먹어줬다.
그리고 선배가 택비시로, 아니 택시비로 이만원을 쥐어준다. 아니 뭘 이런걸 다, 하면서 나는 받는다. 어째 분위기가 촌지 받는 초등학교 교사 같다. 아니 뭘 이런걸 다, 국가의 백년지대계를 위해 귀중하게 쓰겠습니다, 운운. 그리고 택시를 탔다. 좀 머리가 멍해있는데 아저씨가 남부순환도로 쪽으로 가자고 한다. 왠지 택시기사의 이런 제안은 쉽게 승락하기가 어렵다. 팔팔로 가요, 라는 말이 목까지 치밀어 오르다가, 팔팔이나 남부순환도로나 거기서 거기고 택비시, 아니 택시비도 내 돈이 아닌데 좀 돌아가면 어떠랴 싶어서, 아니 정말 사실은 그런 세세한 일로 아저씨랑 알콩달콩 말싸움하기 싫어서, 아니 정말정말 사실은 정작 어디로 가야 빨리 갈 수 있는지 몰라서 그냥 가만히 있었다. 네, 남부순환도로로 가죠. 안막히겠죠? 그럼요, 지금 시간이 몇신데. (결국 안막혔다. 역시.)
그리고 강남대로였나 어디쯤인가를 달릴때 아저씨랑 이바구를 까기 시작했다. 처음에 뭔 일로 이바구를 까기 시작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팔팔이냐 남부순환도로냐 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전말은 이랬다. 팔팔… 은…, 아 팔팔로 가려면 돌아가야 하는데, 아 그래요? 역시 그럼 남부순환도로쪽으로 가요. 그러면서 이바구가 시작된다.
“뭐 하시는 분이세요?”
“학생이에요.”
아, 그러면서 난 이 아저씨가 누구하고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누구냐면, 렌스 헨릭슨. 내가 아주아주 좋아하는 배우다. 에일리언 2인가 3에서 인조인간 비숍으로 나오기도 했고, 엑파의 크리스 카터가 의욕적으로 제작했던, 그러나 불운하게도 실패했던 외화 시리즈 ‘밀레니엄’의 주인공으로 열연했던, 어딘가 모르게 엑스트라오디너리한 곳을 바라보는 눈빛을 한, 서글픈 중년, 아니 노년의 배우.
“피곤하시겠어요?”
“피곤하더라도 이렇게 해야 입금을 하죠.”
“아, 정말. 입금은 보통 얼마나 해요?”
“하루에 십일만원 정도 넣어야 해요.”
“그렇게나 많이요? 그럼, 죄송하지만, 그렇게 해서 한달에 어느 정도 받으세요?”
“하루에 열여섯시간 정도 운전하고 해야 잘하면 백오십 정도?”
“어휴.. 택시비 오른다고 사람들 맨날 욕하는데, 그래도 운전하시는 분들한테는 그게 안돌아가나봐요?”
“택시비 오르면 뭐합니까. 입금도 그만큼 늘어나는데. 그나마 올해 또 택시비 오른다고 하는데, 그땐 입금은 그대로 한다니까 그 말만 믿어봐야죠.”
“근데 그것도 확실한 이야기는 아니잖아요.”
“그렇죠. 허허.”
미터기가 촤르르륵 올라간다. 신림동 어림쯤을 지나고 있었다. 술 기운 때문에 감각이 제대로 돌아오지 않아서 마치 뇌만 고무로 된 몸체에 넣어 둔 것 같았다. 날이 갈 수록, 불치병에 걸린 것처럼 뭔가 제대로 되질 않는다. 감각이 없다.
“어디 학생이에요?
“숭실대학교 다녀요.”
“우리 아들은 이번에 건대 졸업했어요.”
“아니, 마흔 아홉이시라더니 벌써 아드님이 대학을 졸업했어요?”
“허허, 제가 좀 일찍 결혼했죠.”
“젊었을 땐 뭐 하셨어요?”
“제가 한 십오년 일식요리를 했어요. 그땐 식당도 좀 크게 했었고. 그러다가 처가랑 좀 싸움이 생겨서… 칼부림도 좀 나고 그랬죠.”
“아.. 그럼?”
“이혼한지 꽤 됐어요. 애들한텐 이 일하면서 한달에 백만원씩 부쳐줬는데, 졸업하면서 이젠 너희들도 성인이니까 돈은 더 이상 못부쳐준다 했더니 그 다음부턴 찾아오질 않더라구요, 허허.”
“아직도 혼자세요?”
“그렇죠 뭐.”
“어디 사시는데요?”
“… 살아요.”
“혼자 사시면 쓸쓸하시겠어요.”
“그렇죠 뭐. 그래서 퇴근하면서 집에 들어가기 전에 쏘주 한 병 사들도 그거 먹고 자고 그래요.”
그리고 서부트럭터미널쯤을 지난다. 벌컥 ‘렌스 헨릭슨’의 불꺼진 방이 떠올랐다. 그는 고단한 몸을 가누며 구멍가게에 들러 쏘주 한 병을 산다. 덜컹, 덜컹 두번 잠긴 골목길 옆 반지하 방의 문을 열고 들어서면, 싸늘한 냉기가 건조하게 그를 반긴다. 여전히 아침에 아무렇게나 해놓고 나간 그대로다. 이부자리에선 희미하게 곰팡이 냄새가 난다. 티븨를 틀면, 치지지직 하는, out of service 상태. 대충 김치를 꺼내 소주를 마신다. 몇 번이나 핸드폰을 열어 아들에게 전화를 해볼까 생각하지만, 하지 않기로 한다. 너무나도 누추하기 때문이다. 내일은 또 어떤 손님을 태우게 될까, 장거리였으면 좋겠다. 그 손님을 내려주며, 또 장거리 손님을 태웠으면 좋겠다. 거기서 또 장거리 손님을 태우고… 그리고 불을 끄고 자리에 눕는다. 눕고 나니 씻는걸 잊었다. 하지만 다시 씻으러 일어나지 않기로 한다. 너무나도 누추하기 때문이다. 커다란 고래가 삼킨 것처럼 벌컥 의식의 불이 꺼진다. 잠깐, 어디선가 희미하게 비냄새가 난다. 한 여름 지나치게 마른 땅에 내리던 소나기의 냄새.
“아저씨, 저… 이만원 드릴께요. 어차피 이 돈 선배가 택시비 하라고 준거고…”
미터기는 만 육천원쯤에 멎어있다.
“아니,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괜찮아요 학생.”
“아뇨, 정말 저 이거 제 돈 아니에요. 선배가 준거에요. 괜찮아요, 받으세요.”
렌스 헨릭슨은, 그러니까 그 노년의 배우와 어느 홀아비 택시 운전수는 웃는 모습까지도 닮았다. 웃는 건지 얼굴을 찌푸리는 건지 알 수가 없다.
“학생, 고맙습니다. 열심히 살아요, 학생도.”
“아저씨도 열심히 사세요.”
열심히 살아요, 가 그 날 마지막 ‘렌스 헨릭슨’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길을 건너기 위해 육교를 올라, 난간에 팔을 대고 그의 택시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오래동안 지켜보았다. 진심으로 그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장거리 손님을 많이 태우는 것도 행복이고 그의 아들에게 연락이 오는 것도 행복이며 택시회사들이 버스회사와 마찬가지로 서울시로 편입되는 것도 행복이다. 그것들 중 어느 것이라도 좋으니 그가 행복하기를 바랬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왈칵 눈물이 났다. 육교 저쪽에서 고삐리로 보이는 두 남녀가 술에 취해 비틀거리며 씨발이라던지 조까를 외치며 지나가서, 나도모르게 얼굴을 닦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집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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