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 버스를 타고 돌아오며 칸트의 논문을 뒤적이다가 살짝 잠이 들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하늘의 구름은 낮고 잔뜩 흐렸다. 공기는 맑았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흙 냄새가 났다. 거짓말처럼 이어폰에서 시규어 로스가 튀어 나왔다. 비둘기 두 마리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나는 희고, 다른 하나는 검었다. 순간 흐린 구름이 반으로 갈리며 빛이 홍수처럼 쏟아졌다. 때맞춰 비둘기가 날아 올랐는데, 그 날개들은 쏟아지는 빛에 부딪혀 은빛으로 빛났다. 온 세상에 날갯짓 소리가 퍼졌다. 상승하는 것과 하강하는, 시규어 로스의 음악은 그랬다. 영원회귀란 말이지. 이 모든 것들은 언젠가 똑같이 반복한다는 것. 그건 절망도 아니고 권태도 아니었다. 내 모든 삶이 오늘, 바로 이 순간에 모이는 것이다.
오랫동안, 비둘기가 구름 사이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서서, 내게로 다가오는, 그리고 내게서 멀어지는 세계의 감각에 취해 있었다.

안녕, 순간이여.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

아서 클라크 타계

클라크경이 금일 향년 90세의 나이로 타계하였습니다.

… 어쨌든 우주를 향해 영원히 여행을 계속하게 될 이 프로그램이 언젠가 그들의 시선을 끈다면, 그들 역시 당신을 가장 먼 시야를 갖고 자신들의 존재를 미리 예고해 준 중요한 선구자로 기리고 싶어할 겁니다….

스탠리 큐브릭이 1994년 8월 22일 아서 클라크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나는

소주에 한 잔 하고, 그 벌건 취기에 아무도 없는 골목길에서 아 씨발 한 번 욕해주고 가까스로, 달도 별도 없는 어둑한 골방에 처박혀 무사히 잠들어 아침이 되면 나는, 심지어 나도 믿지 않는 희망을 주머니에 꼭꼭 담아서 학교에 간다. 승해가 총회때 과방이 더러워 지는 것을 두고, 우주의 엔트로피가 항상 증가하는 것처럼 그건 필연적이라고 하더라. 물리적인건 그렇겠지. 그래서 난 더욱 가망 없는 꿈을 꾼다. 몽상 속에서만 현실의 저열함이 극복된다. 현실의 저열함, 이라고 말했지만 사실 그건 내 저열함이고…

끝도 없이 추락하는 꿈.
걸으면 걸을 수록 어깨가 무거워 진다.
내가 나를 벗어날 수 있었으면.

2008 대학시절

2008 대학시절


새내기의 가슴에는 ‘토익900’ 책들이 가득하였다.
새로 지은 건물의 기둥은 크고 아름다웠지만
그곳에서는 스마트카드 학생증조차 무기로 사용되었다.
그 아름다운 기둥에 이르면 청년들은 각오한 듯
눈을 감고 지나갔다, 빈 기념사업회 안에서
나는 러브크래프트를 읽었다, 그 때마다 꽹과리가 울렸다.
시험기간이 아닌데도 친구들은 도서관과 학원으로 흩어졌고
취업을 준비하던 후배는 정수기 외판원이 되었다고 털어놓았다.
존경하는 강사 선배들은 있었으나 그분들은 원체 수업이 없었다.
몇 번의 휴학이 지나자 나는 외톨이가 되었다.
그리고 졸업일테다, 대학을 떠나기가 두려웠다.

—>
기형도의 ‘대학시절’ 패러디.
죄송합니다.

꿈 얘기

엊그제였나, 간만에 악몽을 꾸었다. 꿈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서 중간에 한 번 깼다가 다시 잠들었을 때 또 다른 한 편의 꿈을 꾸게 된다.

#1

내가 FBI 요원인가 뭔가가 되어서 연쇄살인범을 쫓는 상황이다. 범인의 흔적을 찾아 야지의 버려진 도축장에 도달했는데, 도축장이라기 보다 마치 버려진 극장 같기도 했다. 스테이지 위에는 뼈만 남은 소들이 여럿 줄에 매달려 있었다. 군데군데 구멍이 난 천정으로부터 빛이 들어오는데, 환하게 빛나는 기둥같았다. 그 사이로 먼지가 흩날린다.
범인의 흔적을 놓친 것인가 좌절하고 있을 때, 갑자기 문이 열리고 누군가 들어왔다. 머리에 거대한 뿔이 달린 우두인(牛頭人)이었다. 범인은 바로 그였다. 나는 총을 들어 그에게 겨누며 멈추라고 말했는데, 그는 말 없이 계속 내게로 다가왔다. 한 걸음 앞에 당도한 그에게 총을 발사하려고 했지만 역시나 총은 발사되지 않고, 나는 그 뿔에 가슴을 꿰뚫렸다.

#2

자전거를 타고 좁은 벼랑 사이를 위태위태 달리다가 곧 허물어 질 것 같은 아파트 옥상에 닿게 되었다. 밑을 내려다 보니 까마득하게 높은 아파트였다. 나는 자전거를 분해해 일단 밑으로 던져 놓고 내려가는 계단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파트가 휘청이기 시작한다. 마음이 급해졌다. 내려가는 계단은 굳은 철문으로 닫혀 있었는데, 힘들게 철문을 열고 나니 온갖 잡동사니로 계단은 꽉 막혀 있었다. 하늘은 뿌옇게 흐렸고, 그제서야 나는 고소공포증이 있었다는걸 기억해냈다.

자연 생태계는 그 자체로 종의 규모를 통제할 방법을 가지고 있다. 그냥 두고 보면 어떤 종이 폭발적으로 늘어나 생태계를 평정하는 일은 없다. 먹이 사슬은 아주 간단한 모습으로 그 방법을 표현한다. 먹이 사슬의 최상층에 있는 종은 스스로가 평형을 이룬다. 초원에서 누우는 많지만, 사자는 자주 볼 수 없는 것이 그 이유다.

인간은 과학으로 자기 자신을 먹이 사슬로부터 이탈시켰다. 인간을 먹이로 삼는 종은 없다. 인간은 스스로 규모의 평형을 이룰 만큼 현명하지도 못하다.

그래서 자살이 발명되었다. 무기가 발명되었고, 그것은 전쟁으로 발전되었다. 상호 확증 파괴1가 발명되었고, 종교 분쟁이나 학살이 발명되었다. 환경 오염이 발명되었고, 연쇄 살인이 발명되었다. 한 쪽이 비만으로 고통받을 때 똑같이 다른 쪽은 굶주림으로 고통받았는데, 그것의 대부분의 이유는 경제적인 것이었다. 보다 더 효율적으로 서로를 죽이기 위해 매년 엄청난 예산이 연구에 투입된다.

자연은 놀라운 방법으로 인간 종을 평형 상태로 유지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1. 상호 확증 파괴. 책임지고 상대방을 완전 괴멸시킴. 혹은 그것을 가능케 하는 무기나 전략을 의미함. 냉전 시대의 산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