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결혼했습니다. 오래전에 어렴풋이, 독신주의자는 아니지만 아마도 내게 결혼이란건 좀 무리일 것 같아, 그렇게 예감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했습니다. 이렇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 같습니다.

결혼식에 와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축하해주셔서 정말 기뻤습니다. 앞으로 나와 동거인이 행복한 것만을 생각하겠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Network, 1976

나쁜 것들에 대해 이야기 할 필요도 없어. 당신들도 이미 알고 있으니까. 불경기지. 모두가 이미 실직 상태이거나 실직할까봐 두려워하고 있어. 돈 들고 나가봐야 살 수 있는건 거의 없고, 은행들은 파산하고, 가게 주인들은 카운터 밑에 총을 놔두지. 펑크 빠돌이들이 거리를 점령하고 누구도 뭘 어째야 할지 모르고 있어. 아무도 언제 이게 끝날지 몰라. 공기가 나빠서 숨쉬기도 어렵고 음식도 더러워서 먹을 수도 없어. 우리는 그저 앉아서 어떤 지역 방송 아나운서가 오늘은 열다섯명이 살해당했고 예순 세 건의 강력범죄가 일어났습니다 하고 지껄이는걸 보고 있지, 마치 세상 사는 일이 다 그런 것처럼. 당신들도 이미 알고 있어, 진짜 문제가 뭔지. 미친 놈들 천지야. 온 세계가 미쳐가는 것 같아. 그래서 우린 밖엘 나가지 않지. 우린 그저 집에 앉아서 서서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계가 좁아져 가는걸 견디고 있어. 그리고 고작 한다는 소리가 ‘제발, 적어도 이 집에서만은 우릴 가만히 놔둬요. 내가 토스터를 사게 놔둬요, 티븨를 사게 둬요, 강철 벨트가 들어있는 타이어를 사게 놔둬요, 그럼 아무 소리 안할게요. 제발 우릴 놔둬요!’ 라고 말이지. 그래? 하지만 난 널 혼자 가만 놔두지 않을꺼야. 난 네가 화내길 원해! 난 네가 데모하는걸 원치 않아. 난 네가 폭동을 일으키기도 원치 않아. 난 네가 국회의원에게 탄원서를 보내는 것도 원하지 않아. 왜냐하면 네가 탄원서에 뭐라고 써야할지는 나도 모르니까. 난 이 불경기와 인플레이션과 러시아에 대해서, 그리고 거리에서 일어나는 범죄들에 대해서 어찌해야 하는지 몰라. 내가 아는건 먼저 네가 화내야 한다는거야. 넌 이렇게 외쳐야 해. ‘나는 인간이다, 씨발! 내 삶은 가치가 있다!‘ 자, 이제 일어나. 모두 의자를 걷어차. 지금 당장 일어나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고 머리를 곧게 세우며 이렇게 외쳐라. ‘나는 지금 미칠듯이 화가난다! 난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What of me – Trespassers William

 

What of me
– Trespassers William

 

It’s a place that’s not so far
I dream there and sometimes I wake there
Do you want me caring less
Sometimes we don’t ask for what we need
And I guess how I want to be loved
And I’ve guessed what of me you need
It doesn’t matter if we lie
Your sentences never defined you
Do you think that I can’t feel
When I touch you there’s words on your body
Should you be scared
When I say sometimes I’d want you dead
So no one else can have you when it ends
How’d I reach this point on my own
And how fragile right there I was
This is not the first time
That I’ve watched the end of that thing that had no end
Do you want me caring less
Sometimes we let go of what we need
Why can’t you guess how I want to be loved
You can’t even tell me what of me you need

아줌마 저기 그거… 그러니까… 제가 맨날 피우던게 뭐죠?

나는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부모님께 담배를 피우겠다는 선언을 하고 흡연을 시작했다. 중고등학생때 잘나가는 아이들이 말보로 피우던 모습을 가끔 목격하기도 했지만, 초심자의 마음으로 내가 처음 선택했던 담배는 88이었다. 그러다 곧 88 골드로 기종(?)을 바꿨고, 가끔 도라지 필터를 끊고 피우는 등의 빠른 진도를 보이기도 했다.

내 군시절은 소위 군팔이 군디스로 바뀌는 시기였고 덕분에 군팔과 군디스를 모두 경험할 수 있었다. 군디스를 보급받던 시절에 휴가를 나가면 선배들이 부럽다는 소리를 하곤 했는데, 그런 소리를 하는 선배들은 모두 양담배를 피우고 있었으므로 나는 속으로 막 욕을 했던 기억이 난다.

제대 후에는 줄곧 디스를 피웠다. 88을 구할 수 없던 것도 아니지만, 군대에서 1년간 디스를 피우고 나니까 다시 88로 돌아가기가 힘들었다. 말보로나 던힐, 마일드 세븐을 피우던 여자 동기들은 여전히 말보로나 던힐, 마일드 세븐을 피우고 있었다. 애국자도 아니었으면서 양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이유는 일단 가격 차이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1학년때의 어떤 일 때문이었다. 당시 나는 학생회에서 활동을 했었는데, 학내의 어떤 행사에… 아니다 그 얘긴 안하는게 좋겠다. 어쨌든 트라우마가 좀 있어서 양담배를 피우고 싶은 생각이 좀처럼 들지 않았던거다.

친구들이 모두 제대를 하고 난 다음부터, 세련된 국산 담배들이 출시되기 시작했던 것 같다. 기억나는건 시나브로 (친구들은 시나브로를 디스를 똥구멍에 넣었다 뺀 담배라고 불렀다.), 레종, 타임, 더 원… 아이들은 점점 디스를 버리고 레종으로 타임으로 옮겨갔다. 나는 여전히 디스를 피웠다. 줄곧 디스를 버린 녀석들에게 나는 반쯤 농담으로 부르주아 새끼들이라고 불렀는데, 하루는 친구 하나가 디스랑 자기가 피우는 레종인가랑 백원 차이밖에 안나는데 어째서 부르주아냐고 항변했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디스 플러스가 나오고 난 자연스럽게 디스 플러스로 이적. 아마 가장 오랜 시간동안 피웠던 담배가 디스 플러스였을 것이다.

그러다 작년에 다니던 회사 회식때 담배가 떨어져서 어쩔까 하는 와중, 경리 아가씨가 피우던 담배가 있길래 하나만 달라고 해서 피웠던게 팔리아멘트였다. 그런데 이게 꽤 괜찮았다. 아… 양담배를 이래서 피우는구나 싶었다. 나는 다음날부터 당장 팔리아멘트로 담배를 바꿨다. 그렇게 또 그걸 한 1년 피웠다.

최근에 피우는 담배는 던힐 밸런스다. 내가 이걸 피우게 된건 두어달 되지 않는데, 자주 가는 술집에서 담배가 떨어져 아는 사람 담배를 하나 빌려 피운다는게 던힐 밸런스였던 것이다. 맛은 뭐 그냥 무난했다. 팔리아멘트나 던힐 밸런스나. 그런데 내가 담배를 또 바꾸게 된 이유는 던힐 밸런스는 종이 덮개 안에 비닐 덮개가 하나 더 있어서 담배가루가 새어나오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무튼 그렇게 던힐 밸런스를 피우고 있다.

그런데 내가 왜 이걸 쓰고 있냐면, 내가 던힐 밸런스에 대해서 뭔가 심리적으로 밀어내려는 경향이 있는지 담배를 사러 가게에 들어가면 갑자기 던힐 밸런스 이름이 생각 안나는거다. 던힐까지는 생각이 나는데 밸런슨가 뭔가가 생각이 잘 안난다. 몇 번은 무의식적으로 팔리아멘트를 달라고 했다가 바꾸기도 했다.

오늘도 퇴근 후에 집 근처 가게에 들어갔다가 한 십초를 ‘어… 음… 아줌마 담배… 음… 뭐였지? 아줌마 저 뭐 피우죠?’ 했던거다. 허허.

뭐 그렇게 삽니다.

ain’t no sunshine

10년 전에 그녀는 이혼했다.
6년 전에는 다시 한 번 더 술을 마시면 다음에는 자기가 아니라 장의사를 만나러 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의사의 핀잔을 들었으며,
2년 전에는 목소리가 갑자기 나오지 않아 수술을 받아야만 했다.
9개월 전부터는 허리 디스크로 인한 통증 때문에 하이힐은 커녕 십 분 이상 서 있기도 힘들었다.
19일 전에는 삼개월이나 밀린 방세 때문에 드디어 집에서 쫓겨났고
지금은 클럽 주인인 조니의  배려로 가게가 문을 닫고 나면 간신히 분장실 한 쪽 간이침대에서 잠을 잘 수가 있다.
그래도 웃으며 무대에 선다. 웃으며, 나는 웃음을 판다.


Joan Osborne – “Ain’t No Sunshine” – Live at The Roxy

(* 위 내용은 실제 Joan Osborne의 삶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삼각형 모양의 하루

잔뜩 신경을 쓰고 있었더니 어깨가 또 굳어왔다. 민방위 훈련장에서는 내내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고 있었다. 핵폭발시 행동요령을 듣고 있자니 쓴 웃음이 났다. 굵은 팔뚝에 퍼렇게 문신을 한 사내와 세 번을 마주쳤다. 한 번은 담배 피우다가, 또 한 번은 화장실 앞에서, 마지막은 훈련이 끝나서 귀가하던 도중에. 버스를 한참 기다리다가 그 곳에서는 어느 노선을 타도 집에 갈 수 없다는걸 깨닫고는 다시 한 번 쓴 웃음이 났다.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운전 내내 딸과 아들 자랑이었다. 그의 딸은 노스랜드인가 뉴질랜드인가에서 2년간 영어를 배웠고 무슨 교육 자격증을 따서 귀국 후 유치원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데, 그게 돈이 꽤 된단다. 젊은 것이 독하게 하루에 몇 탕을, 그의 표현을 빌자면, 뛰는걸 보고 세 탕만 뛰고 나머지는 과외를 하라고 호통을 쳤다는, 그게 그의 딸에 대한 염려라면 염려였다. 전문대 밖에 못나온 아들은 기특하게도 삼성 하청 회사에서 일한다는데, 3년만에 대리를 달았고 연봉이 또 얼마라는 이야기를 했다. 최근엔 매월 20만원을 더 준다는 경쟁 회사에 스카웃 제의를 받고 고민했다는데, 또 호통을 치며 옮기지 말라고 했단다. 가만 있기가 뭐해서, 잘 하셨어요 회사 자주 옮기는건 좋지 않죠, 하며 맞장구를 쳤다. 나는 다른 한쪽으로 진저리를 쳤다. 다행스럽게 그 즈음에서 내릴 곳이 되었다.

돌아오며 동사무소에 들러서 새로 입사한 회사에 제출할 등본을 떼고 언덕을 내려가는데, 그만 다리에 힘이 탁 풀렸다. 십분 전 기억이 꿈처럼 모호했다. 실시간으로 모호함이 갱신되었다. 한쪽으로는 자기파괴가 진행되고 다른 한쪽으로는 자기수복이 진행되는, 터미네이터의 T-1000이 된 느낌이었다. 그 느낌은 자체로는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나는 그냥 ‘있기만 하면’ 되었다. 항상 전쟁은 나의 최전방에서만 일어났고, 중심의 뒷편에 있는 나는 관찰하기만 하면 되었다. 알아서 하라지, 알아서 세 탕을 네 탕을 뛰라지, 알아서 이직을 하고 알아서 대리를 달라지, 나는 여기서 계속 관찰할테다, 움직이지 않을테다. 하지만 이 어지러움과 구역감의 원인은 세계에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었음을, 나는 여전히 알고 있고 부인할 수 없다.

오래 전에 나는 가능하면 내가 믿는 이야기 대신 믿지 않는 이야기만 하기로 다짐했다. 사람들은 내가 믿지 않는 이야기를 들려줄 때 더 좋아했다. 그래서 차마 당신들을 믿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할 수 없었다.

네가 제공하는 것, 내게 필요한 것

민방위 훈련의 훈련 일정을 묻기 위해 동사무소에 전화를 건다. 처음에 전화를 받은 직원은 담당이 아닌듯, 잠시만 기다리라고 하고 담당하는 사람에게 전화를 돌려주었다.

“이번 민방위 훈련 일정 때문에 전화드렸는데요. 제가 이번주에 훈련 참가를 못할 것 같아서 그러는데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죠?”

“이번에 못받으면 다음에 받으면 되요.”

나이 지긋한 목소리의 남성이 불친절하게 대답한다.

“그러니까 전화드렸잖아요. 다음 일정이 어떻게 됩니까?”

“일정이… 5월 15일 16일에 있고… 17일이랑 18일에…”

“이번주에 사정이 있어서 훈련을 못받는다구요. 다음주는 어떻게 됩니까?”

“다음 일정은, 그러니까 31일, 27일… 에, 또…”

“아무튼 다음주에도 훈련이 있는거죠?”

“네.”

“다음주 무슨 요일…”

“(딸깍)”

“…”

나는 친절함을 원하진 않는다. 사랑도 원하지 않는다. 적어도 내가 하는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적절하게 대답해주기를 바란다. 17일에 훈련 일정을 묻는 사람에게 15일날 훈련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는 것이고, 원하는게 다음주 훈련 일정이면 다음주에 훈련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무슨 요일에 몇시에 있는지만 알려주면 된다. 31일, 27일은 또 뭐야. 대체 저 fully-꼰대풀한 답변은 뭐냐고.

그냥 그런 얘기

아르바이트 몇 개를 했거나 하고 있는데, 내가 처음부터 작업을 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이미 만들어진 것을 변형하거나 데이터 마이그레이션 작업을 하는 것이다. 자기가 만든 코드도 육개월이 지나면 보기 싫어지고 뭔가 자꾸 리팩토링 하고 싶어지거나, 싹 지우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고 싶어지는게 이 바닥의 인지상정인데, 하물며 남이 여러해 전에 날림으로 만든 것이야 오죽할까. 끔찍한 비유지만, 마치 태어나자마자 개천에 버려진 기형의 아기가 끈질긴 목숨으로 살아나 성인이 되었을 때의 모습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장담하건데, 이 코드를 만든 사람도 자기가 뭘 만들고 있는지 모르는게 분명했다. 의미없이 이 파일이 저 파일을 인클루드하고, 그런게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물론, 그래 물론, 나도 이런 비난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아마 아무도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실 딱히 뭔가 짚고 싶은건 없다. 말 나와 봐야 똑같다. 그 얘기가 그 얘기. 뭐 좀 더 잘하자, 정도? 책임을 지자? 우습다. 누가 책임을 져. 그거 만든 개발자만의 책임도 아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납기일만 되뇌이며 쪼는 PM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자기가 뭘 원하는지 제대로 모르면서 어디서 주워들은 것만 가지고 이런거 가능하죠? 쉽죠? 운운하는 클라이언트 문제도, 이쯤 되면 나오는 대한민국은 원래, 하는 것의 문제도 아니다. 그런 코드들은 수도 없이 많고, 그럭저럭 돌아가고 있다. 그래, 그게 문제라면 문제다. 그럭저럭 돌아간다는 것. 소스코드는 원래 겉으로 드러나는 생산물이 아니다. 사용자(user)는 인터페이스만 본다. 심지어 게시글을 GD 라이브러리를 통해서 이미지로 구워서 보여줘도, 이쁘게만 보이면 그만이다. 그냥 보이면 된다. 돌아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만 해도 오케이.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우리 세계는 조금씩 불안과 우연을 얼기설기 이은 지푸라기 위에서, 더 위로, 더 위태로운 그 위로 한 발 한 발 내딛는 것이다.

말 나온 김에 이번에 농협 시스템 장애도 걸고 넘어가보자. 전산시스템을 아웃소싱 했다고 하는데, 그게 그쪽 생리인지는 몰라도 금융권 시스템에 대한 완전한 지배력이 금융사 자신에게 있지 않고 외부에 있다는건 내 깜냥으로는 도무지 이해가 안된다. 그건 그냥 커뮤니티 사이트가 아니라 하루에도 수백억씩 오고가는 시스템이다. 이 바닥에선 이런 시스템을 미션 크리티컬(mission critical)한 서비스라고 부른다. 만약 문제가 생기면 한두사람 잘리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의미. 아웃소싱해도 처음엔 시스템이 잘 도는 것처럼 보였으리라. 사람들 인터넷 뱅킹 하는데 문제 없고 이것저것 서비스 하는데 문제가 없으면 오케이. 그냥 그러고 넘어간 것이다. 아무도 이게 어떻게 돌아가고 왜 이렇게 돌아가고 뭐가 어디에 붙어 있으며 그건 무슨 기능을 담당하고 어쩔씨구리 저쩔씨구리 그런건 신경 안쓴거다. 그리고 기업의 입장에서는, ‘그러면 된거 아닌가?’ 했겠지. 차는 굴러가면 되고 집은 비바람을 피하면 되고 밥은 먹어서 배부르면 되고… 이런 양적 만족감에만 하악하악하고 있었다는건, 누구의 말대로 이 시스템들이 얼마나 우연의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돌아가고 있었는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덧붙이자면, 3차 테이프 백업본 있어서 그걸로 복구하면 된다고 하는데 나 진지하게 묻고 싶다. 혹시 백업 플랜을 짜면서 그냥 데이터만 디립따 아카이빙하고 있었는건 아닌지. 가끔가다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을 대비해서, 혹시라도 누군가가 ‘백업 제대로 되고 있는지 테스트 서버에다 리스토어해서 한 번 돌려볼까?’ 하고 말해 본 적은 있는지, 그냥 궁금하다. 그냥 아카이빙만 풀어 놓으면 예전처럼 시스템 제대로 돌아갈꺼라고 믿는 그런 순진한 사람들인가, 싶다. 뭐? 열시간이면 된다고? 야 이놈들아, 내가 쪼끄만 사이트 데이터 이전하고 셋팅하고 문제되는 부분 잡고 하는 시간만 해도 그정도다. 이놈들아.

뭐 됐고. 혹시나 내 대출정보도 함께 날아가는 아쌀한 이벤트가 있을까 싶어 들어가봤더니, 그건 여전하데. 허허. 뭐 됐어. 잘 돌아가면 된거지. 안그래?